2013년 4월 11일 - 온유함에 담겨진 "선"의 영원함. 희망과 인내의 열매는 영원 합니다. -
- "믿는 이들"은 어떤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봅니다. -
- 소공녀 세라와 마치 '신데렐라'와 같이..


<아버지께서는 아드님을 사랑하시고 모든 것을 그분 손에 내주셨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3,31-36 위에서 오시는 분은 모든 것 위에 계신다. 땅에서 난 사람은 땅에 속하고 땅에 속한 것을 말하는데, 하늘에서 오시는 분은 모든 것 위에 계신다. 그분께서는 친히 보고 들으신 것을 증언하신다.
그러나 아무도... 그분의 증언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분의 증언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하느님께서 참되심을 확증한 것이다.
하느님께서 보내신 분께서는 하느님의 말씀을 하신다. 하느님께서 한량없이 성령을 주시기 때문이다. 아버지께서는 아드님을 사랑하시고 모든 것을 그분 손에 내주셨다. 아드님을 믿는 이는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 그러나 아드님께 순종하지 않는 자는 생명을 보지 못할 뿐만 아니라, 하느님의 진노가 그 사람 위에 머무르게 된다.
주님의 말씀 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 오늘의 묵상
프랑스의 철학자 중에서 ‘사르트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20세기를 대표하는 지성인 가운데 한 사람으로서 신(神)의 존재를
부정하는 무신론적 철학자이자 뛰어난 문필가이기도 합니다.
그는 종교적 가르침이 없이도 인간은 충분히 선할 수 있다면서
그리스도교의 교리를 강하게 비판하였습니다.
그러던 그가 노년에 폐부종(肺浮腫)이라는 병으로 입원했습니다.
의사가 그에게 임종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했을 때,
그는 의사에게 욕을 하면서 물건을 던지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죽음에 대한 공포 때문입니다.
결국 그는 마음의 평화를 잃은 채 고통스럽게 죽었습니다.
그가 세상을 떠난 뒤 언론 매체들은
‘사르트르는 왜 그렇게 괴로워하며 죽어야만 했던가?
죽음으로부터 자유를 외쳤던 그의 말로가 왜 그토록 비참했던가?’ 하며
실망과 아쉬움의 기사를 내놓았습니다.
그러한 가운데 독자 한 명이 신문에 이렇게 기고했다고 합니다.
“사르트르는 분명 신앙인이 아니다.
그의 말로가 그렇게도 비참했던 이유는 분명하다.
그에게는 돌아갈 고향이 없었기 때문이다.”
오늘 복음에서 “땅에서 난 사람은 땅에 속하고
땅에 속한 것을 말한다.”고 하였습니다.
사르트르는 현실 세계에 대해서는 뛰어난 지성을 자랑하였지만,
하늘 나라에 대한 그리스도의 증언은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의 죽음이 비참했던 것은 영원한 생명에 대한
믿음도, 희망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이 세상의 삶에 너무 얽매인 나머지
하늘 나라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에 소홀하지는 않습니까?
-출처 매일 미사-
<아버지께서는 아드님을 사랑하시고 모든 것을 그분 손에 내주셨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3,31-36 위에서 오시는 분은 모든 것 위에 계신다. 땅에서 난 사람은 땅에 속하고 땅에 속한 것을 말하는데, 하늘에서 오시는 분은 모든 것 위에 계신다. 그분께서는 친히 보고 들으신 것을 증언하신다.
그러나 아무도... 그분의 증언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분의 증언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하느님께서 참되심을 확증한 것이다.
하느님께서 보내신 분께서는 하느님의 말씀을 하신다. 하느님께서 한량없이 성령을 주시기 때문이다. 아버지께서는 아드님을 사랑하시고 모든 것을 그분 손에 내주셨다. 아드님을 믿는 이는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 그러나 아드님께 순종하지 않는 자는 생명을 보지 못할 뿐만 아니라, 하느님의 진노가 그 사람 위에 머무르게 된다.
주님의 말씀 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 오늘의 묵상
프랑스의 철학자 중에서 ‘사르트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20세기를 대표하는 지성인 가운데 한 사람으로서 신(神)의 존재를
부정하는 무신론적 철학자이자 뛰어난 문필가이기도 합니다.
그는 종교적 가르침이 없이도 인간은 충분히 선할 수 있다면서
그리스도교의 교리를 강하게 비판하였습니다.
그러던 그가 노년에 폐부종(肺浮腫)이라는 병으로 입원했습니다.
의사가 그에게 임종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했을 때,
그는 의사에게 욕을 하면서 물건을 던지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죽음에 대한 공포 때문입니다.
결국 그는 마음의 평화를 잃은 채 고통스럽게 죽었습니다.
그가 세상을 떠난 뒤 언론 매체들은
‘사르트르는 왜 그렇게 괴로워하며 죽어야만 했던가?
죽음으로부터 자유를 외쳤던 그의 말로가 왜 그토록 비참했던가?’ 하며
실망과 아쉬움의 기사를 내놓았습니다.
그러한 가운데 독자 한 명이 신문에 이렇게 기고했다고 합니다.
“사르트르는 분명 신앙인이 아니다.
그의 말로가 그렇게도 비참했던 이유는 분명하다.
그에게는 돌아갈 고향이 없었기 때문이다.”
오늘 복음에서 “땅에서 난 사람은 땅에 속하고
땅에 속한 것을 말한다.”고 하였습니다.
사르트르는 현실 세계에 대해서는 뛰어난 지성을 자랑하였지만,
하늘 나라에 대한 그리스도의 증언은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의 죽음이 비참했던 것은 영원한 생명에 대한
믿음도, 희망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이 세상의 삶에 너무 얽매인 나머지
하늘 나라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에 소홀하지는 않습니까?
-출처 매일 미사-